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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구리 장명부
    노닐기 2015. 3. 3. 11:25






















    ★1983 - 너구리 장명부

    82년을 참담하게 보낸뒤 삼미 슈퍼스타즈는 새로운 전력을 보강하여 83시즌을 맞는다.

    제일 먼저 눈에 뛰는 것은 재일동포 장명부와 이영구,82년 세계 아마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의 주역 포수 김진우와 투수 임호균이 이었다.또한 아마추어 야구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며 '인천 야구의 대부'라는 자존심이 대단한 인하대 감독 김진영을 2대 감독으로 선임해 인천 야구의 부흥을 맡긴 것이었다.

    일본에서 82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장명부는 삼미의 끈질긴 구애에 못이겨 한국행을 결심한다.(장명부선수의 자세한 이야기는 인물열전 편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 삼미는 천문학적 액수인 4000만엔 (1억2천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그를 영입했는데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였던 박철순의 연봉은 2천4백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인가. 게다가 주택까지 제공 되었다.그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 장명부의 입단식. 왼쪽은 유격수 이영구

     장명부의 입단과정도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그의 한국행이 결정되자 삼미는 기뻐서 신문에 대서특필을하기 시작하는데 오래간만에 비보가 아닌 주제로 신문에 삼미의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한국에 가기로하고 난후 계약날짜가 남아 있자 장명부는 당시 일본에서 전훈중이던 삼성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가 배팅볼투수를 자청하며 삼성타자들을 상대로 배팅볼을 던져 준다. 이에 삼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미에게는 "나 아직 계약 안했는데"라며 응수해 삼미를 더욱 긴장시킨다.하지만 장명부는 배팅볼을 던져주며 이만수,장효조등 국내 최고 삼성의 막강타선을 분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전기리그에 서 그를 상대로 15타수 1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은 기본,30승이 목표다.20승도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삼미의 허영 사장과 KBO 이호언 사무차장은 장명부의 승수를 놓고 30승은 힘들고 박철순의 24승 정도를 예상했다.이를 들은 장명부는 허영사장에게 만약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이에 허사장은 어짜피 30승은 불가능 할꺼란 생각에 농담조로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말한다.이렇게 농담조로 말한 허사장의 약속을 장명부는 가슴속 깊이 세긴다.(뒷날 이약속은 큰 문제를일으킨다.)

     한국에 와서 구단에 상대팀 타자들의 자료를 요구 했지만 그당시 국내엔 그런 자료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자료를 만들기로 하고 감독에게 시범경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경기에 출전시켜달라고 한다.그리곤 시범경기에서 직구로만 승부하며 타자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간다.  시범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상대팀은 '장명부 별거 아니네'하며 방심한다. 이런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불멸의 30승은 가능했던 것이다.

    팬들은 올해도 삼미의 꼴지 유지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시범경기 서 부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3월23일 인천 MBC와의 시범경기에서 정구선,김진우,이영구가 3연속타자 홈런을 때려 버렸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어쩌다 그런일도 생길 수 있지'하며 삼미의 약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4월12일엔 지난해 16전 전패를 당한 OB와의 첫 게임에서 9회까지 5:5였던 게임을 장명부의 역투와 연장 13회초에 터진 공격으로 6득점해 11:5로 대승을 거두며 지긋지긋한 OB전 연패의 기록을 날려 버린다.

     <= 딱! 쳤습니다. 천하무적 OB베어스의 공을!!!

     

     

     

     

     

    <김진우>

     

     

    시즌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입을 담을 수 없었다. 꼴찌팀 삼미의 돌풍! 그 한가운데는 장명부가 있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 때는 상대팀이 그들이 나오는 게임만 포기하고 다음 게임을 노리면 됐지만 장명부는 아니었다. 완봉승을 하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8월에는 나흘 연속 등판해 완투승, 2이닝 마무리, 2.1이닝 마무리, 완투승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00게임중 60게임에 등판해 30승16패6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몇이닝이나 던졌을까? 요즘은 투수가 200 이닝을 던지면 대단한 투수로 인정을 받는데 그의 투구이닝은 자그마치 427.1/3이닝이었다. 정말 철완이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등판한 이유는 바로 돈 때문, 시즌전 허영사장과 약속한 30승=1억 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게임에 정상적으로 출전해선 30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감독을 졸라 선발 중간 가리지 않고 등판해 목표인 30승을 이뤄내고 만다.

    선발로 나가면 완투 마무리로 나가면 세이브로 보통땐 슬슬 던지다 위기땐 전력 피칭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당시 국내 타자들에겐 생소한 사이드암 투수인데다 145km의 빠른 직구와 낙차큰 커브, 스크류볼등 변화구의 완벽한 제구력과 능수능란한 완급조절 ,수읽기,틈틈이 던지는 위협구등 기존 국내 투수들관 비교도 안되는 무시무시한 투수였다.

    지금도 '장명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빈볼' 항상 빙글빙글 웃는 포커페이스인데다 상황에 따라 타자의 머리통을 향해 거리낌 없이 빈볼을 던지고 나서 놀란 타자를 바라보며 아무렇치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마치 '너구리'같아'너구리'란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과 집단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관중들에게 야구의 또다른 재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명부에게 인천팬들은 '너구리'라면을 BOX채로 선물 하기도 했다

    아무튼 삼미는 장명부와 제 2선발 임호균의 원투 펀치 선발이 합이 42승을 거둘정도로 둘의활약은 대단했다. 타격쪽에선 들쭉날쭉 점수를 뽑는 공격력은 여전했지만 팀 최초의 3할타자 양승관을 위시로 김대진,이영구등의 좋은 타격과 OB연고 출신이었으나 삼미가 거져 주워온 정구선의 공수양면에서의 활약으로 지난해와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임호균>

    전년과 달라진 전력으로 전기리그에서 선두를 질주하며 전기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삼미호앞에 뜻하지 않은 암초가 나타나고 만다. 6월1일 잠실 MBC전에서 그동안 훌륭한 지도력으로 팀을 이끌어오던 김진영감독의 폭력구속 사태가 벌어진것이다.

     전날인 5월31일 MBC전 장명부가 완투하던 9회말 2:2 동점에서 3:2로 역전당해 장명부의 8연승이 끈겨 버려

    김감독은 심기가 불편했다. 6월1일 임호균과 MBC유종겸의 선발 맞대결로 투수전으로 진행되던 8회초 1:0으로 뒤지던 삼미가 찬스를 잡아 2사 만루가 되었다.3루주자 이영구,2루주자 이선웅,1루주자 김진우 타석엔 6번 최홍석이 들어왔다.최홍석이 좌전 적시타를 터뜨려 3루주자 이영구와 2루주자 이선웅도 홈인해 2:1로 역전에 성공했다.그런데 이게 왠일! 좌익수 이해창(어떤데선 김정수라고도함)이 홈송구를 포기하고 3루로 뛰던 1루주자 김진우를 잡기위해 3루로 송구해 김진우가 아웃돼었다. 김동앙 구심은 김진우의 태그아웃이 이선웅의 홈인보다 빨랐다며 이선웅의 득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삼미코치진은 거칠 게 항의를 하는데, 백스톱뒤에 있던 이기역심판위원장이 빨리 경기를 속행하라고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진영감독은 이심판위원장을 향해 2단옆차기를 날려 버린다. 아! 그러나 김감독과 이심판위원장사이엔 그물이 있었다.

    결국 김진영감독은 그물에 다리가 걸려 땅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데 이날의 게임이 TV로 전국에 중계방송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영 감독의 이 행동은당시 사회정화라는 시대분위기에 어긋난 폭력사범으로 비춰져 결국 게임도 2:1로 지고 6월2일 부산서 롯데를 4:1로 누른 직후 서울로 압송돼 구속돼 버렸다. 구속 10일째인 6월11일KBO서종철 총재의 노력으로 벌금 100만원을 내고 약식기소로 석방된후 시즌종료까지 자숙한다는 조건에 따라 덕아웃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장 뒤쪽에 있는 방에 숨어 전령을 통해 작전을 지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해서는 제대로 된 작전을 펼 수 없었다. 결국 삼미호의 욱일승천하던 기세는 꺽이고 사령탑을 잃은체 중심을 잃기 시작한다. <근신중에 장명부에게 장외에서 작전지시를 하는 김감독>

     

    *짠물생각 - 나도 TV로 그 장면을 목격했는데 기억나는 것은 김진영감독이 거칠 게 항의하다 이가 받아들이지 않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모자를 내팽게치고 유니폼 상의를 찢으며 심판에게 달려들던것 하고 이단 옆차기가 실패해 땅에 떨어지던 장면이다. 그날의 발차기는 메이져리그에서 한 박찬호의 발차기보다 훨씬 멋있었다.

     

    <=메이져리그에서도 통한 박찬호의 태권 발차기(1999년)

     

     

     이재환 감독대행 체제로 전환 된 삼미는 2승을 더 보태 전기리그 12게임을 남기고 24승14패를 마크하며 1위를 유지해 남은 게임에서 반타작만 해도 30승으로 전기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인천야구를 외면하고 만다.남은 14게임중 10승을 거둬야 30승에 도달할 수 있었던 2위 해태와의 운명의 광주 3연전을 벌이게 되는데...

                                    <당시 삼미가 잘나가던 시절의 신문기사>

    *매직넘버 11을 남겨둔 삼미와 2.5게임차로 뒤진 2위 해태의 6월7일부터 9일 까지의 광주 3연전 :

    1차전 - 장명부와 이상윤의 선발대결, 김진우가 솔로홈런을 기록했으나 10:1패

    2차전 - 임호균과 김성한의 선발대결, 선발 예정이던 김용남의 부상으로 타자 김성한이 선발로 나왔으나

                김성한에게 5:0 완봉패

     

     

    <=임호균 .뭐라고 쓰여있나 잘보면 "나 임호균이 장명부를 받치고 있다"라고 써있다.

     

     

     

    3차전 - 장명부와 주동식 선발대결, 제일 동포 투수끼리 대결서 장명부 3:0패

    여기서 3연패하므로서 0.5게임 차로 선두가 바뀌게 되는데 이 3연전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열화와 같은 광주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이었다. 일방적이다 못해 삼미선수들의 신변에 위협을 느낄정도로 과격한 응원이었던 것이다. 이재환 감독대행은 그 당시 "해태와 싸우기전에 우선 관중과의 싸움에서 졌다.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몸을 다치지 않고 하루 빨리 광주구장을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명부는 광주구장에선 경호원을 붙여 주지 않으면 던지지 않겟다고 할 정도 였다.인천야구의 운명을 갈라놓은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결국 해태가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삼미는 눈물의 2위로 전기리그를 마쳐야 했다.

     후기리그 들어서 심기일전의 자세로 뛴 삼미는 8월 17일 까지 9승2패로 선두를 달리던중 8월2일 코치겸 선수로 옮겨온 백인천(82시즌후 연봉협상서 MBC와 마찰로 6월30일 선수자격으로 삼미로 트레이드 됨)이 가정문제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진다.전반기 김진영감독 구속에 이은 또다른 악재가 발생한 것이다.

        

     

    *짠물 생각 - TV중계때 하일성해설위원에게 아나운서가 백인천 사건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하일성은 야구랑 관련없는 질문이라면 답변을 사양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 가정문제란 무엇일까? 물론 바람이지 .난 이름이 인천인 '백인천'이 인천팀에 와서 웃기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도 감독하다가 다른팀 선수로 오다니...

    <=백인천

     

     

     

     이사건 이후 팀분위기는 또다시 어수선해 졌고 팀타선도 침묵한데다 팀전력의 핵심인 너구리 장명부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6연패를 당하고 만다. 분하게 지면 다음날 연투도 불사하던 장명부가 더 이상 그런 투지를 발휘하지 않았던 것이다.

     9월2일 이재환 감독대행,이선덕 감독대행(7월5일~9월1일 82년에 이어 두번째) 대신 팀의 고문이던 박현식 초대감독을 총감독으로 복귀시켜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그러나 박현식이 처음 지휘한 3일 롯데전에서 삼미는 결정적인 오심으로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는다.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는 종반까지 1­1로 팽팽하게 어울리다 9회초 선두 김용철에게 중월 2루타를 허용하면서 1사3루의 핀치에 몰리자 필사적인 만루책을 폈다. 여기서 롯데 심재원이 초구 스퀴즈번트를 대자 장명부는 재빨리 홈으로 송구, 타이밍상 아웃으로 보였으나 김영일 구심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포수 김진우의 발이 플레이트에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펄펄 뛰며 항의하던 삼미는 KBO에 제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롯데는 뒤이어 병살타를 때려 추가득점에 실패했지만 이미 2­1 승리의 결승점을 얻어놓고난 다음이었다. 이날 패배에 충격을 받은 삼미는 이튿날 롯데에 6­0으로 완패, 3위로 가라앉았고 그뒤로는 해태와 2∼3위를 놓고 싸우면서도 앞서 달리는 MBC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박현식은 시즌 종료까지 20게임을 지휘하면서 8승1무11패의 성적을 남겼다.

     최종 성적을 살펴보면 52승 47패 1무로 승률 .525 지금 같으면 플레이 오프에 나갈텐데 예전엔 그런게 없었으니... . 전기리그에선 2위,후기리그에선 3위로 종합순위 3위를 마크함.(그당시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 아니 코리안 시리즈를 치뤘다)

    올스타전엔 장명부 김진우 양승관 임호균이 뽑혔는데 김진우와 장명부는 팀에서 처음으로 팬투표에 의한 BEST 10 에 뽑혔다. 골든글러브는 장명부와 2루수 정구선이 탔다.또한 양승관은 팀 최초로 0.302의타율로 3할 타자가 되었다.

           

     

     

     

    <=83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 맨 오른쪽이 장명부 오른쪽 4번째 회색양복이

    정구선

     

     

     

     

     

     

     

     

     

    <=83년 베스트10에 뽑힌 장명부와 해태 김무종(둘다 제일동포)이 시상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흐리고 있다. 일본에서 서러움을 받던 시절이 떠올랐나 보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관중동원이었다. 전년도 꼴찌였던 삼미는 장명부의 돌풍으로 관중이 폭발적으로 늘어 관중 초과수입을 짭짤하게 챙겼다.82년 76,513명에서 83년 332,436명으로 늘었다.

    *짠물생각 - 영종 운서 국민학교 6학년 남자반엔 삼미팬이 딱 한명 뿐이었는데 내짝 종간이란 아이었다. 그땐 해태에서 나온 '홈런콘'이란 아이스크림콘이 있었는데 그 속엔 야구선수 사진이 들어있었다. 내가 고른 홈런콘엔 왜 맨날 삼성 장태수만 나오는지... 석원이란 친구가 고른 것에선 해태 주동식사진이 들었었는데 그에 되게 부러웠다.홈런콘 선전엔 해태김성한 김봉연 김준환이 나왔다.삼미 선수 사진은 본 기억이 없다.삼미 사진은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어쩌다 한번씩 인천에서 구해오는 소년중앙 잡지에 장명부의 기사와 함께 사진이 있었다.물론 빳빳한 종이에 칼라로 나오는 앞쪽에 실린게 아니라 뒤쪽에 실린 거였다.그래서 장명부사진을 오려서 종간이에게 팔았던 기억이 난다. 거기엔 투수 임호균기사도 있었는데 그 선수는 얼굴이 여자처럼 이쁘게 생겨서 여자팬들이 많았었다.그래서 별명이 제비였다.내가 산 소년중앙 잡지에 각팀의 모든 선수의 사진과 프로필이 담긴 부록도 있었는데 홈런콘에 들어있는 사진처럼 작게 짤라서 모으기도 했다.지금 그걸 다 가지고 있으면 훌륭한 자료가 됐을텐데...

       

    위의 사진들이 바로 그 홈런콘에 들어있던 사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카드라 할 수 있다. 더 웃기는 것은 롯데 선수들의 카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홈런콘이 해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경쟁 업체인 롯데 선수들 것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나 보다. 왼쪽부터 이영구,장정기, 또 장정기, 조흥운 (딱지-http://www.omoo.com/)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bruce2k.com.ne.kr/198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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